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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된 아신왕의 항복 삼국시대

본문 글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후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하였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끌려갔고, 이는 사실상 백제왕조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삼국사기』「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다음 해 왜에 전지 태자를 볼모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하 댓글


회원 m

"아리수를 건너 성을 찌르고 죄어 보내었다. □□소굴로 돌아가니 □편을 둘러쌌다. 백잔주가 죄임에 괴로워하여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나와 바치며 왕 앞에 꿇어앉아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로워 □헛갈리고 죄지은 것을 용서하였다. 적기로 그 후 따르며 성실하였다. 이에 얻기를 58성 700촌 데려가기를 잔주제와 대신 10인이니 군사를 되돌려 환도하다."


광개토왕비의 이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굳이 꼭 멸망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조선 인조도 무릎 꿇고 제발 봐달라고 빌었으나 나라가 망하진 않았습니다.

왜 이런 기록이 삼국사기에 빠졌을지는......... 모르겠군요. 삼국사기의 원본이 되는 구삼국사에 원래 빠져있던 기록이라 삼국사기에도 여전히 빠진 게 아닐까 하는 단편적인 생각이 들긴 하는데, 설령 그렇다면 정치적 의도일까요?

잘 모르겠군요. 님처럼 저도 궁금합니다. 07.02.25 13:47



회원 미

저도 m님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고구려는 주변 국가를 고구려 일부로 흡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공을 받으면서 속국 형식으로 국가를 유지시켜 준 경우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제도 그러한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한 나라의 군주로서 '노객이 되겠다'라는 표현에는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는지?


고구려에 조공 바치던 국가의 군주는 고구려에 대해 '노객' 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더군요. 광개토왕비에도 백제왕과 신라왕이 자신을 '노객' 이라 표현하고 있고, 중원고구려비에서도 앞뒤가 뜻은 잘려 알 수는 없으나 '노객인'(奴客人)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신라왕을 지칭하는지도 07.02.25 14:13


중국 지안시의 광개토왕릉비중국 지안시의 광개토왕릉비

(출처 : 바이두 백과)


회원 m

광개토왕비를 보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어 말하니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가 무너지고 깨어지니 이에 백성이 노객이 되니 귀왕의 명을 청한다.’ "


이 경우의 奴客은 신라와 백제왕이 칭하던 奴客과는 별개로 떼어놓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백제, 신라왕이 1인칭의 奴客이라면 이 부분의 奴客은 절대로 1인칭이 아닌데, 노객奴客의 奴는 포로라는 뜻이 있으니 "백성이 노객이 되었다"는 부분은 왜인이 신라인들을 포로로 많이 잡았다는 뜻으로 봐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奴客이란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인데, ............ 이거 뭐 제가 부족해서 말은 여기까집니다...-_-;; 


허접한 결론은 奴客이 어떠한 문맥에 쓰였냐에 따라 다른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뭐 당연한 말인데.... 뭔 말인지 말인지... 제가 써놓고도 이상하네요... -_-;; 07.02.25 17:1



회원 려

비문에 기록된 왕과 고구려에 끌려갔다는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아신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보면요... 07.02.25 17:28



회원 조

그럼 삼국사기의 다른 왕 기록에 396년의 일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ㅋ

게다가 광개토태왕 대의 백제 왕은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이렇게 세 명이고, 396년의 백제왕은 아신왕이었으니 말입니다. 07.02.25 23:40



회원 려

흐음...비문은 철저히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이므로 고구려인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어야 하지만.. 삼국사기는 삼국이 끝난 이후에 남겨진 기록입니다. 편찬자가(김부식 등이) 어떠한 서술 원칙에 의해 자료들을 정리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예를 들면 유교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상한 것은 삭제 혹은 변형, 뭐 이런 식으로요. 삼국사기에서 아예 비문 관련된 내용이 빠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왜 그런지를 이제 이해해야 하겠지만 말이죠. ^^ 07.02.26 08:28


김부식 등이 저술한 삼국사기김부식 등이 저술한 삼국사기

(출처 : douban)

회원 Z

윗 토론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의견이기도 하겠습니다만 '모두루묘지명'에서도 '奴客'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고구려왕'에게 굴복한 아래의 사람들을 '노객'이라고 지칭한 것이 아닐까요?? 07.02.25 18:21


회원 미

Z 님이 먼저 이야기를 하셨군요. ^^

모두루묘지명에서도 '노객'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단순한 포로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 시대에는 관용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 고구려의 서울은 평양이다...라고 했을 때 서울을 일반 명사로 사용했을 때처럼)


/ 그리고 m님, 언급하신 구절은 以奴客爲民 일 텐데, '이에 백성이 노객이 되니.' 가 아니라'노객을 (왜의)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로 해석하는 것이 낫습니다.


짧은 한문 실력을 더듬어 보면, 以[A] 爲[B] 구문은 'A로써 B를 삼다/A를 B로 만들다(변화시키다)' 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즉, 이 구절은 왜가 침공해 와서 '노객' 을 왜의 백성으로 만들려 하니 왕(=고구려왕)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때의 '노객' 은 문맥상 신라왕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 歸王請命 도 '귀왕의 명을 청한다' 보다는 '왕(고구려왕)에게 귀의(의존)하고자 하니 (신라로 출병하겠다는) 명을 요청합니다' 가 더 낫지 않을까요?) 앞서 백제왕이 고구려왕에게 '노객이 되겠다' 라는 구절과 묶어 생각해 보면, 결국 '노객' 이란 단어는 고구려 천하관에서 고구려의 속국 군주가 고구려왕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노객' 개념은 그렇게 보입니다. 


/ 다만 모두루묘지명의 '노객' 단어로 보아 '노객' 이 속국 군주만을 지칭했던 건 아닌 듯합니다. 07.02.25 20:31


고구려 모도루 묘지명의 판본고구려 모도루 묘지명의 판본

(출처 : 阿敏博客)


회원 Z

답변 감사합니다^^ 07.02.25 22:09



회원 m

저도 감사합니다.~ 집에 광개토왕비문 해석본 파일이 4개 정도 있는데 해석이 다 다릅니다. 그래도 거의 다 비슷한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님 지적대로 옳은 쪽으로 해석된 것만 취해야겠습니다. ^^ 07.02.26 11:19


회원 L

노객은 신라왕을 낮춰서 부른 것 같은 데... 07.02.27 15:36



회원 Z

모두루묘지명에도 '노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노객이 과연 신라왕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노객이라는 말이 단지 신라왕을 낮추어서 부른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할 듯 07.02.27 22:46



회원 나

아하...... 여기서 여쭙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백잔의 의미가 잔인한 백제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나요? 07.02.25 23:21



회원 Z

잔인한 백제라는 의미보다는 고구려에서 백제는 비하하는 의미로 불렀다고 보시는 것이 맞을 듯 ..  (뭐 .. 잔인하다면 잔인하다고 볼 수 있겠죠. 고구려로써는 자국의 왕을 백제의 공격으로 인해 잃었으니깐요..) 07.02.25 23:22


회원 돌

고구려가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았던 것은 고구려 일부로 통합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요?

부여나 동예, 옥저의 경우 처음엔 조공국으로 대우하는 과정을 거쳐 완전히 통합했고, 예전 김용만 선생님의 말갈에 관한 글을 보면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의 전신은 옛 소국들인데, 그렇다면 이들 또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통합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사실 신라도 한동안 조공국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병합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 신라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군사가 몰살당하면서 기회를 놓쳤지만...어쨌든 백제와 신라도 완전흡수를 위한 과정의 하나로 위와 같은 상황이 전개된 것이 아닐지... 07.02.26 11:15


회원 Z

고구려가 실제로 신라 병합을 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3년(481) 3월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신라의 7성을 함락시켰지만, 백제, 가야가 신라를 지원해서 고구려가 패퇴했다고 하네요. 07.02.26 20:26


405년 아시아 정세405년 아시아 정세

(출처 : 역개루, 눌러서 크게 보세요)


회원 대

광개토 태왕은 멸망을 시키기보다는 한민족 아래의 통합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묘인제도에도 백제인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07.02.26 20:14


회원 Z

수묘인제도에 '백제인?' 태왕릉비에는 수묘인의 구성을 고구려의 원구성인인 구민(舊民)과 태왕의 정복활동으로 포로가 된 신래한예(新來韓穢)를 1:2의 비율로 구성한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  이 신래한예가 구체적으로 백제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07.02.26 20:20



회원 대

아신왕이 무릎을 꿇을 때 고구려가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군요.

그리고 여세를 몰아 신라를 병합하고 가야마저 아울렀다면 통일을 달성했다면 한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인데 말이죠.  



회원 Z

태왕이 단순히 백제나 신라 그리고 가야지역을 완전 병합시키지 않고 굴복만 시킨 것은 북쪽에 아직 후연이나 거란 등 만만치 않은 세력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 만약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의 국가들 완전 병합을 노렸다면 엄청난 병력과 자원을 투입했을 텐데 그렇다면 거란, 후연 등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테고 그렇다면 고구려는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 훨씬 위험하겠죠. 07.02.25 18:29



회원 나

그렇군요.

그리고 백제는 기본적으로 국력이 강성했었죠. 거란은 고구려 영향권 안에 포함되지 않았었나요?

거란이 이탈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음, 태왕은 후연을 실질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했던 거 로 알고 있습니다. 잔여세력이 계속 지배하도록 허락한 것이 북연이고 그럼 충분히 한반도 남쪽 국가들을 병합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07.02.25 23:34


회원 Z

제 생각에 거란이 고구려의 영향권에 포섭된 것은 광개토태왕 즉위년에 이루어졌던 거란 정벌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토대로 보자면 태왕 9년부터 태왕 15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후연의 싸움은 누가 한쪽이 우세하다고는 볼 수 없는 서로 치열한 대결이 이어집니다.


이 6년간 후연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고구려는 5만의 대병력을 가야와 왜 세력을 떡실신 시키는 남방 정벌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태왕 15년 기록을 끝으로 전쟁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그동안 후연과의 전쟁으로 인해 소모되었던 국력을 다시 재충전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고구려나 백제도 서로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습니다 (태왕 9년 이후에 해당하는 왕은 백제의 전지왕입니다.).


백제도 이 기간동안 왜와의 관계를 더 돈독히하는 것과 동시에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선 정비에 힘씁니다. 후연이나 남방정벌로 어느 정도 국력이 소모된 고구려로써는 상당히 요새화되었을 백제의 방어선을 굳이 공격하기는 힘들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백제로써도 고구려를 함부로 공격 못할 것이니 고구려로써도 그것을 바란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07.02.25 23:46

(여기서부터 몇몇 댓글 누락)

(여기서부터 몇몇 댓글 누락)

(여기서부터 몇몇 댓글 누락)


회원 나

대님, 반박할 것이 전혀 없네요;; 07.03.01 17:40


회원 나

고구려는 북위의 국력을 능가했습니다. 북위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고 써 놓으신 1,2,3,4 그대로 사실입니다. 07.03.01 17:39



회원 Z

나님 북위에 대해 나온 책을 읽어보셨나요? 북위는 실질 국력은 고구려의 실질 국력을 크게 능가했습니다. 그런 북위의 불운은 사방의 적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는 이런 북위의 불리한 점을 잘 이용한 것이고요.


간단히 말해서 고구려가 북위에 상대적인 면에서는 우위에 있었겠지만 절대적으로 북위를 능가한 것은 아닙니다. 07.03.01 23:23


회원 역

자님 고구려는 동쪽에 혼자 있었습니까. 백제와 신라가 그냥 있는 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제의 북위 격파의 그런 백제는 고구려에게 솜털 같은 존재였던가요?.


그리고 이후 고구려계가 북위사를 좌시하면서 고구려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며, 사실 북위와 고구려의 혼인 관계를 봐도 북위가 고구려에 도리어 절절매는 등 여러 상황에서 단순히 고구려가 외교적 수완만이 능숙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07.03.02 17:48


역님 그리고 이 당시 외교적 수완이 좋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만큼 역사적으로 깊고 강대한 왕조로서 주변에서 상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 중소세력이 신생 북위보다는 고구려의 요구에 따랐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지요. 요서 유목 쪽이 대륙과 고구려 왕조에서 어느 강한 국가에 붙거나 이라크가 강해서 미국의 요구에 한국이나 영국 등 다국적 국가가 외교 전선을 펴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북위의 국력이 현 이라크 수준은 아니지만. 07.03.02 17:53


그리고 대륙의 낙양을 차지한 왕조가 힘이 약했을 경우 북방지역의 세력은 그 왕조를 동조하기보다 따로 논 기록들이 많습니다. 07.03.02 17:56



회원 나

역님께서 다 말씀해주셨네요. 역사적 소양이 많이 부족해서 짧은 글로 댓글을 달려고 했더니 ㅋㅋ. 07.03.02 18:21



회원 Z

역님//처음에는 댓글로 달았습니다만 쓸 게 많아서 리플로 달았습니다 .. 07.03.03 10:19 나머지는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설명을 못 드리겠습니다만 1번 같은 경우 북위나 고구려 모두 서로 건드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구려는 북연을 영토적으로 차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북연이 위치한 곳 같은 경우 유연이나 북위에게 노출되어 있어 방어가 취약한 곳입니다. 고구려로써는 괜히 북연 땅을 집어삼켜서 북위와 쓸모없는 충돌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되네요. 07.03.01 17:44



회원 나

여기서 더 추가하자면, 장수왕 때에 북연은 더는 완충지대로서 역할은 무실해졌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접수했습니다. 07.03.01 17:52



회원 Z

제 생각입니다만 ... 영향력만 끼쳤을 뿐 접수했다고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북위와 고구려의 세력이 교차하는 지역으로 말입니다. 07.03.01 21:58

회원 나

음, 자님 말씀대로 세력이 교차하는 지역이면 아마도 영향력 반, 접수가 반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07.03.02 18:18


북위 유연 송 토욕혼 돌궐 고구려 병립도북위 유연 송 토욕혼 돌궐 고구려 병립도

(출처 : tieba)


회원 Z

그리고 북위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알맹이는 고구려가 먹었지만, 그 알맹이 되찾겠다고 고구려와 싸운다면 북위에게는 매우 불리해지는 상황입니다.


북위의 북쪽에는 북위가 화북통일 전쟁에서 만난 잔챙이국가들보다 몇 배는 강력한 유목제국 '유연'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에는 한인(漢人)의 남조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북위로써는 이익보다 손실이 더 컸습니다. 07.03.01 17:46



회원 Z

4번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북위로써도 백제의 협공에 좋은 반응을 보였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나 유연, 남조 등 남북 쪽에 강력한 적을 둔 상황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북위 측으로써도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더라도 백제가 선전해줄지 의문인 데다가 (아니면 위덕왕 때처럼 수의 고구려 원정을 팔짱 끼고 구경한 것처럼 그랬을 지도) ..  백제와는 국교가 설사 악화하더라도 당장은 북위 측에게는 손해가 없었기에 고구려에 국서를 돌려준 것 같습니다 07.03.01 23:25



회원 Z

북위가 고구려보다 인구와 영토 면에서 훨씬 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외교적인 측면으로 북위와의 전쟁 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동방 질서를 움직이는 하나의 축으로 움직인 거죠.. 07.03.01 17:50



회원 Z

그리고 고구려가 435년에 북위의 계보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북위가 당시 화북통일 전쟁에 전념하고 있었던 상황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시 화북은 사실상 북위가 제패하다시피 했지만, 아직 완전한 통일을 이룩한 것은 아닌 데다가 화북 지역이 안정된 상황도 아니었고 남북에는 적들이 북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런 북위의 상황을 간파하고 북위에 계보를 보여달라고 요구한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 북위의 황제이자 화북으로 들어온 유목민 군주 중 전진의 부견과 함께 최고의 정복군주인 태무제는 필시 분노했겠지만, 아직 화북을 완전히 제패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불화를 일으키기는 힘들었기에 그냥 고구려의 요구를 묵살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단지 계보 요구만을 했다고 해서 고구려가 무조건 북위의 상국이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보 요구 사건은 고구려가 북중국의 왕조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제국'이었다고 봐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07.03.01 23:30



회원 Z

마지막으로 3번 역시 북위 내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말해줄 뿐 고구려가 무조건(?) 북위의 상국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07.03.01 23:32


회원 大

제가 고구려가 북위의 상국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네이버에 어떤 분이 이런 논리만 가지고 북위와 대등한 위치라면 모를까 북위의 상국이라고 하여 적은 것입니다 07.03.02 14:44



회원 나

북위가 고구려에 조공을 했으니 고구려가 상국('조공을 받는 나라')이 맞지요. 07.03.02 18:22


회원 Z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서적을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7.03.02 21:39



회원 나

자님 죄송합니다.ㅠ 07.03.03 16:32



회원 한

북위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나님. 어떤 학자가 그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한 게 몇 년 전의 일이지만 그 학자분께서는 아직 그 증거자료를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조공 책봉에 대한 개념을 근대의 종주국 종속국 개념으로만 생각하고 계시는데 그건 근대의 눈으로 고대를 바라보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조공 책봉은 현대 주권국가 간 종주, 종속관계와 다릅니다. 07.03.03 04:49



회원 나

아,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07.03.03 16:31




5호16국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 재밌는 글을 목격했네요.

제가 예전에 관리자로 몸담던 한사모의 글이라 더더욱 재밌는 글이었습니다.


출처 - 한사모 : 백제 아신왕 대에... ...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2007년 2월 25일)



ps. 상상력을 가미해 고구려 본기에 빠진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고려 초기에, 고구려의 사서가 대부분 소실된 상황입니다. 그래도 없는 기록이라도 모아 구삼국사를 만들었습니다. 동명왕편에서도 보이는 설화적인 내용이라도 일단 모아서 여차여차 추가를 했겠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1. 책을 만드는 관계자들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은 믿을 수 없다 해서 누락 (고구려 기록 <-> 백제 기록)

2. 동명왕편에 나오듯, 지나칠 정도로 설화적인 표현들도 믿을 수 없다 해서 누락 (동명왕편의 내용이 현재 삼국사기엔 대부분 빠짐)

3. 애초부터 관련 기록이 없어서 못 적음


이 정도가 아닐까요.



출처: http://decentliar.tistory.com/32 [흥미로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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